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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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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265회 작성일 18-09-2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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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0월부터 1935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의열단(義烈團)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의 운영을 통해, 1기생 26, 2기생 55, 3기생 44명 등 125명에 이르는 청년투사를 양성하였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였다.

 

간부학교는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중국정부는 이봉창·윤봉길의거를 통해 과시된 한인의 항일투쟁역량을 그들의 반만항일투쟁체계 속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의열단은 중국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이처럼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이와 함께 의열단의 입장에서 볼 때, 간부학교는 설립목적과 운영체제 면에서 볼 때, 1920년대 후반 북경에서 운영하였던 레닌주의정치학교의 후신 성격도 띠었다. 간부학교 졸업생을 국내에 침투시켜 대중조직 건설 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간부학교 교장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취지가 의열단의 항일투쟁정신 계승에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사용법 등 군사지식의 수학임을 천명했다.

 

간부학교 교육목표는 일제와의 총결전시 투쟁주체가 될 대중조직 구축을 위한 선행단계로 대중역량의 조직화·체계화를 선도할 중견간부의 양성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의열단 투쟁 전략의 골간은 만주지역 및 국내의 대중투쟁 역량을 기반으로,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투쟁 국면을 거족적 대중투쟁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김원봉과 의열단의 주도권 장악을 뒷받침한 인적기반이 되었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다시 광복군(光復軍)의 주요 무장역량이 되었다. 또 다른 세력은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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