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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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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18-09-2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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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복(金 榮 宓)

 

1920.8.2. ~ 1993.8.30.

상동면 고정리 798

학생운동(대구사범 반딧불)

애족장(1990)

 

김영복 선생은 192082일 밀양군 상동면 고정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월담(月潭), 재질이 총명하여 학업이 우수하고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해 매사에 공명하니 부모의 촉망이 대단하였다고 전해진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선생은 동기생이며 밀양 출신인 임굉(혹은 林炳讚)의 주동으로이태길·최낙철·장세파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하던 힘이 되어야 하겠다고 의논하였다. 그 결과 대구부 동운정 350번지에 사는 학우 이무영의 하숙방에서 비밀결사체인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회원들은 당시의 국제정세 분석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회원들 스스로의 실력양성에 매진함으로써 광복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학술 연구를 표방하며 항일의식을 고양하였으며, 비밀 엄수, 매월 10일의 연구 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 포섭 등의 활동 방침을 정하였다. 이 조직에서 김영복 선생은 생물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과부 책임자 겸 사무원을 맡았다. 19412월부터 3월까지 6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방향 등을 논의하였는데, 회원들이 졸업 후에도 장기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업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 회원들이 교사로 부임하게 될 것이므로,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현지 활동 상황 및 성과를 매월 1 차례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보고 사항은 사무원이 종합하여 회원 모두에게 다시 배부하기로 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으로 가장키로 하였다.

1941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김영복 선생은 19414월 충남 예산군 신암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연구회에서 결의를 가졌던 뜻을 일관하고자 학생과 학부형들에게 은근한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다가 언행의 수상함을 경찰이 감지하고, 내사를 시작한 경찰에게 1941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수중에 들어감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내 학생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19417월에 예산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때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대구사범학교 관련자는 김영복과 임굉 외에 35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18개월 동안 미결수로 고문을 당하였고, 재판에 회부되어 1943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2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4526일 만기 출옥하였다. 해방 후 밀양에서 교직에 몸을 담아 후학을 양성하다가 1993830일 작고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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