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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김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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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91회 작성일 18-09-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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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 지(金 大 池)

1891.10.7. ~ 194310.26

내이동 847

임시정부(임시정부활동/의열단)

독립장(1980)

 

 

金大地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호는 일봉(一峰)이고 김태일(金太一김치환(金致煥) 등의 여러 이명을 쓰기도 했다.

1891107일 밀양도호부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47번지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사립 동화학교를 다녔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전홍표 교장의 발탁으로 중학과정의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인재양성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원봉·김상윤·최수봉 등이 그때의 제자들이었다.

1913년경 밀양에서 구영필·이수택·황상규 등과 함께 일합사를 설립하여 항일운동 조직으로 운영하다 19182월경 경찰에 체포되었고, 손톱 여덟 개가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기소된 후 4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구영필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봉천 등지에서 재류하고 있다가, 19193월경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헌장 제정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내무부의 9인 위원 중 1인으로도 선임되었다. 11월에는 국내조사원으로 밀양에 특파되어 몇몇 재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헌납 받아 상해로 갖고 갔다.

19203,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을 위한 무기류 구입을 위해 길림에서 상해로 온 김원봉 등 단원 4인을 도와 폭약과 탄피 구입이 가능토록 해주고, 프랑스조계 보창로의 자기 집에서 폭탄 3개를 완제토록 하였다. 또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코자 안동현으로 우송하는 데도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3~24년에도 상해에서 김원봉에게 의열단의 활동계획에 관해 매번 상의를 받고 의견을 내주는 고문 역할을 맡아했으며, 인각에 능한 특기를 발휘하여 ’() 자의 윗변에 해당하는 양()의 형체를 그려 넣은 의열단의 비밀인장도 고안해주었다.

이렇게 밀양 출신 청년 독립투사들의 맏형 격 위치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지도하여 의열투쟁의 새 장을 열게끔 해주고 있던 그는 1926년 문창범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로 가려다 구영필의 요청으로 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머물러있게 되었다. 거기서 한동안 민족유일당운동에 진력하다 1933년 아성현 취원창으로 옮겨가 극빈 속에 한의술을 베풀며 살던 중, 1943년 음력 10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서훈 승격되었다. 취원창의 묘지가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니, 2003년에 경주 인근의 신선사 옆에 유족이 가묘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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